64. 아그니에츠카 홀랜드/<카핑 베토벤>(2007)/유머있는 베토벤

64. 아그니에츠카 홀랜드, ‘카핑 베토벤'(2007)/유머 있는 베토벤, 에드 헬리스의 베토벤, 조금 헷갈립니다. 내가 이 영화를 본 건 베토벤을 보기 위해서였나, 아니면 에드 해리스를 보기 위해서였나. 확실히 베토벤과 같은 압도적인 역사적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캐스팅부터가 문제입니다. 비록 남아있는 사진은 없더라도 초상화로 널리 통용되는 외모 이미지가 존재한다면 캐스팅 과정에서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베토벤 역을 맡은 에드 해리스는 불멸의 연인(1994, 버나드 로즈)에서 베토벤 역을 맡은 게리 올드먼과는 또 달리 그만의 베토벤을 구현하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토벤 연기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핵심이 되는 성격의 특성은 아무래도 신경질적인 편협함 또는 막무가내로 다혈질적인 정도일 것 같은데, 여기에 에드 해리스는 유머를 곁들여 놓았다는 점에서 새롭습니다. 베토벤이 셋방에 사는 위층 자신의 방에서 거침없는 분방한 태도로 머리를 감을 때 아래층 사람이 물이 샌다고 베토벤을 들으라고 큰소리로 외치는 상황이 그 한 예입니다. 베토벤은 청력에 이상이 있고 그런 것은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아래층 사람은 항상 진지하게 (!) 소리를 질러 줍니다. 반면 베토벤(ベートーベンは、一方、それ)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즐거울 뿐이에요. 이 대조가 정말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가슴이 아픕니다. 이 전혀 다른 두 감정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에드 해리스의 연기가 독특합니다. 이 특징을 감독이 좀 더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입니다. 그랬더라면 어차피 완전한 허구적 인물을 설정해서 베토벤 곁에 둔 의도에 더해서 또 다른 의미로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거죠. 요컨대 베토벤이라는 이 한없이 위대하면서도 문제적인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정말 오랜만에 정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관객의 욕망과 감독의 의도도 있지만 영화는 제가 보기에 어느 시점에서 순식간에 방향을 잃는 느낌입니다. 또는 여러 방향으로 물색 없이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영화는 전체적으로 뭔가 조금 부족해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또 하나의 베토벤 전기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에 대한 저의 기대는 사실 다른 곳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음악입니다. 큰 극장에서 훌륭한 사운드 시스템을 통해 베토벤의 음악을 마음껏 듣고 싶다는 욕망, 이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원초적인 욕망이 얼마나 충족되는지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 제 마음속 깊이 숨겨진 진짜 동기이자 이 영화에 대해 만족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바로미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바로 이 점에서 제 기대를, 역시 상당히 배반해 버렸습니다. 선곡에 문제가 있었다는 거죠. 음악의 몰입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편집도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감독님의 의도를 저는 존중합니다. 감독님이 그런 방식의 편집을 통해서 또는 그런 선곡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뭔가를 인정할 준비는 충분히 돼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토탈 이클립스(1995)의 감독에 대한, 그러니까 과감하게 람보의 생애를 그려낸 바로 그 감독에 대한 예의라고 할까요. 하지만 저는 아주 평범한 관객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선곡과 편집 방식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확실히 이건 음악 애호가들이 음악 영화를 접할 때 어쩔 수 없이 취하는 태도로 일종의 기본값이죠. 여기서 관객의 원초적인 욕망과 감독의 예술적인 의도 사이에 불가피한 불일치가 생깁니다. 이것이 제가 이 영화에서 다른 요소는 제쳐두고 그저 에드 해리스를 잡는 데 주력하는 이유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좋다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한 저의 평가입니다. * 64. 아그니에츠카 홀랜드, ‘카핑 베토벤'(2007)/유머 있는 베토벤, 에드 헬리스의 베토벤, 조금 헷갈립니다. 내가 이 영화를 본 건 베토벤을 보기 위해서였나, 아니면 에드 해리스를 보기 위해서였나. 확실히 베토벤과 같은 압도적인 역사적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캐스팅부터가 문제입니다. 비록 남아있는 사진은 없더라도 초상화로 널리 통용되는 외모 이미지가 존재한다면 캐스팅 과정에서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베토벤 역을 맡은 에드 해리스는 불멸의 연인(1994, 버나드 로즈)에서 베토벤 역을 맡은 게리 올드먼과는 또 달리 그만의 베토벤을 구현하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토벤 연기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핵심이 되는 성격의 특성은 아무래도 신경질적인 편협함 또는 막무가내로 다혈질적인 정도일 것 같은데, 여기에 에드 해리스는 유머를 곁들여 놓았다는 점에서 새롭습니다. 베토벤이 셋방에 사는 위층 자신의 방에서 거침없는 분방한 태도로 머리를 감을 때 아래층 사람이 물이 샌다고 베토벤을 들으라고 큰소리로 외치는 상황이 그 한 예입니다. 베토벤은 청력에 이상이 있고 그런 것은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아래층 사람은 항상 진지하게 (!) 소리를 질러 줍니다. 반면 베토벤(ベートーベンは、一方、それ)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즐거울 뿐이에요. 이 대조가 정말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가슴이 아픕니다. 이 전혀 다른 두 감정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에드 해리스의 연기가 독특합니다. 이 특징을 감독이 좀 더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입니다. 그랬더라면 어차피 완전한 허구적 인물을 설정해서 베토벤 곁에 둔 의도에 더해서 또 다른 의미로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거죠. 요컨대 베토벤이라는 이 한없이 위대하면서도 문제적인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정말 오랜만에 정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관객의 욕망과 감독의 의도도 있지만 영화는 제가 보기에 어느 시점에서 순식간에 방향을 잃는 느낌입니다. 또는 여러 방향으로 물색 없이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영화는 전체적으로 뭔가 조금 부족해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또 하나의 베토벤 전기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에 대한 저의 기대는 사실 다른 곳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음악입니다. 큰 극장에서 훌륭한 사운드 시스템을 통해 베토벤의 음악을 마음껏 듣고 싶은 욕망, 이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원초적인 욕망이 얼마나 충족될 것인가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 내 마음속 깊이 숨겨진 진정한 동기이자 이 영화에 대해 만족할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바로미터